이스터 에그. 부활절 계란을 숨기는 것처럼 게임 내에 무언가를 숨겨놓는 행위 혹은 그렇게 숨긴 것. 이스터 에그를 발견한 사람은 놀라움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으며, 특히 개발자의 다른 작품과 연계된 이스터 에그의 경우 반가움과 친근감까지 얻어갈 수 있다. 세피라들이 차원을 만들 때도 이전에 만들었던 차원의 주요 인물들을 따와서 이스터 에그 삼아 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덤 크래프트도 그 중 하나였다. 이것이 그가 엑스트라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설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애덤 크래프트는 재수생이다. 미술, 특히 회화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예술 지망생이었으나, 교통사고를 당해 수전증을 얻고 색을 잃은 이후로 평생 가졌던 꿈을 포기했다. 그의 온몸을 수놓은 기하학적인 검은 문신 아래에는 수술 흉터가 숨어 있다. 새하얀 오른쪽 눈은 색을 보지 못했으나 새까만 왼쪽 눈은 세상을 보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애덤의 세상은 흑백으로만 채워져 버렸다.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어. 애덤은 뒷산에 오색찬란한 단풍이 든 풍경을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다. 그 색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정말로 소원이 없을 텐데. 염원하는 사람은 뒷산이 오롯이 보이는 창가에서 캔버스에 붓질하기를 반복했다. 봄이 한참 지나 겨울이 되어도, 2019년이 끝나 다시 2019년으로 돌아오길 몇 번을 반복해도 애덤은 그 자리에서 계속 붓만 움직였다. 그것이 애덤의 설정이자 알고리즘이었으니까. 그 차원에서 애덤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붓을 움직이는 것이 끝이였다.
의미없는 2019년을 반복한 횟수가 억 자릿수를 넘어갈 무렵이었다. 애덤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 이 그림을 그린 적이 있지 않았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도록 설정된 알고리즘이 자의식이라는 오류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2019년이 점차 쌓일 수록 중구난방이었던 물감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늘은 푸르게, 단풍잎은 붉게, 자신의 색을 잃었던 물체들이 원래 가져야 했을 색을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수십수백 번 2019년이 반복되고 마침내 애덤의 풍경화가 완성된 날.
"나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흑백 뿐이었으나 애덤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풍경화가 완벽히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지할 수 없는 색을 인지한 그 날, 완성할 수 없는 그림을 완성한 그 날. 애덤 크래프트는 세계의 구조를 깨달았다.
"나는 대체 이 그림을 몇억 번째 그린 거지?"
부패한 시체를 보고싶지 않아서 2019년 새해가 되자마자 형을 찾아갔다.
저 멀리 타임스 스퀘어에서 지난 시간을 떠나보내는 민요가 들려오는 가운데 오피스텔 단지들에서도 온갖 홈파티가 열리는 바람에 시끄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길을 가로지르는 애덤은 주위 분위기를 기묘하고 불쾌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저 행복한 사람들이 그저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애덤은 이 소리들을 게임 bgm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느긋하게 내려오는 엘레베이터가 심장이 터질 정도로 답답하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는 원인은 불안과 공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겠지만. 엘레베이터의 숫자가 낮진 않은 수를 가리키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 애덤은 형이 살고 있는 호실 문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는 열려 있었다. 깔끔한 집안 모습은 거주자가 결백증을 가졌다는 걸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삼색 고양이가 리모콘을 뛰어넘어 도망가는 걸 무시하며 애덤은 곧장 형의 작업실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친다. 좁지는 않은 방 공간을 대부분 차지한 정체불명의 기계장치, 그 기계에 달린 모니터에는 문장 하나가 나타나 있다.
'3126번째 순행'
이상한 단어들의 조합에 흥미가 일기도 하였으나 금방 관심을 끊는다. 그나마 남아있던 좁은 공간에 간이 침대를 깔고 사람이 무단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만 뜬 채로 아무 반응도 없이 누워있는 형을 흔든다. 마치 시체같은 모양새이긴 했으나, 그래도 지난 2019년 8월 28일에 보았던 살이 삭은 시체의 모습은 살펴볼 수 없었으니 애덤 입장에서는 그나마 나았다.
"이안, 일어나. 할 말 있어."
이안 - 애덤의 형은 눈을 깜박인다. 자신을 흔드는 애덤을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지 얼굴을 찌푸렸으나, 저 깊은 곳에 쳐박아두었던 가족에 대한 기억들 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남동생의 얼굴을 끄집어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맙소사. 아냐. 있을 리 없어. 이건 일어나서는-"
"이안! 피하려고 하면 화낼 거야. 나를 똑바로 봐."
애덤으로서는 드물게 단호하고 화난 말투로 말한다. 두려움에 질린 채 숨을 몰아쉬던 형은 한숨을 크게 쉬며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언제부터?"
"뭐가? 이 개같은 2019년에 갇힌 거, 아니면 형을 보러 온 거?"
"이전에도- 나를 만났다고?"
"만나려 왔는데 죽어있던데. 장례는 치뤄줬어."
애덤은 겨우 10년 밖에 타임 루프를 겪지 못했다. 그러나 형의 입장에선 적게 잡아 3000년을 넘는 시간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생을 갑자기 만난 것이다. 오류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그가 크게 동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건 됐고, 이안. 지금 이 일은 네가 일으킨 거 맞지. 저 정체도 모르겠고 생긴 것도 괴상한 기계가 원인인 거지? 당장 멈춰."
"문답무용으로 부수려고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X같게 비꼬지 마."
"난- 못 멈춰. 너도 못 멈출 거고. -우리는 저걸 멈출 수 없어."
직접 보여주겠다며 형은 이불 속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 기계를 겨눴다. 실탄까지 들어있는 진짜 총이었다. 자살용으로 구비해둔다고 굳이 말해준 그 총의 방아쇠를 망설임 없이 당겼다. 총알은 기계를 통과해버렸다. 그래도 파열음은 들리는 걸 보아 아마 뒷편 벽에 맞았을 것이다. 경악한 애덤의 눈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 신이시여. 너 대체 뭘 만든 거야."
"애덤, 넌 아무것도 몰라."
"말 돌리려 하지 말고, 얕잡아 보지도 마. 내가 아는 건 없어도 저 악마의 기계가 세상에 있어선 안 된단 건 알아."
이안은 코웃음을 친다.
"저 기계가 있어야 내가-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어. 너는 정말로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알아서도 안 돼."
"그럼 어디 한번 그게 뭔지 말해봐. 그냥 이상한 자기합리화만 하면서 포기하고 계속 2019년만 반복되도록 놔둘 거야? 이러면 안 돼. 알잖아, 이안."
아무리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한들 애덤의 호기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 형이 말한 세계의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애덤이 답답해하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애덤의 기억 속의 형은 당당하고, 빛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을 잃지 않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망가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에 가졌던 분노보다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는 없었다. 사정을 말해주지 않으려는 형한테 섭섭하고 미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 또한 애덤의 생각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참견하려는 게 짜증날 뿐이다.
"... 됐다-. 내가- 뭘 원해서 말한 건지 모르겠다. 오류는 고쳐줄 테니까 쉬고 있어."
"뭐? 나는 아직 할 말이..."
아직 실탄이 남아있는 권총을 동생의 이마를 향해 겨눈다. 깊은 총구에서 죽음을 읽은 애덤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움직일 틈을 주지 않고 탄환은 목적지를 지나간다. 애덤의 몸은 그 자리에 무너지고 그를 죽인 범인은 별 동요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데스크탑 앞으로 향한다. 몇백 년동안 볼 일 없었던 콘솔창을 띄운 후에야 "나 죽은 뒤에 캣 도망가야 하는데 문은 열고 들어왔는질 모르겠네..."하고 중얼거리는 게 동생에 대한 생각의 끝이였다.
갓 세피라가 된 그가 고향 차원의 세피라에게 당신은 신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나는 세피라이고, 이야기를 만드는 자이며, 이는 너 또한 그렇다. 인간을 초월한 것을 축하한다, 우리의 피조물이여."
그는 촉수에 매달린 채 지금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애원했다.
"지극히 단순하고도 간단하지. 네 형은 시간이 고장나 버려진 차원에서 인간이길 고수하여 미쳐버렸다지? 너는 인간이길 포기하여 더 상위의 존재로 탈피할 수 있었다. 10억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
신의 말씀이 절대성인지 의심스러워 그는 산파법을 사용한 철학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뭐라고? 소크라테스를 묻는 건가?"
애덤은 크게 절망하여 무너졌다.
달칵, 달칵.
애덤은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어른이었다. 신체 곳곳을 꾸민 기하학적인 문신은 화가 지망생이라는 직함으로 설명할 수 있었으며, 어울리기 힘들다는 평가를 듣는 극단적인 호기심 또한 괴짜라는 범주 안에서 납득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 치고 색이 없는 백발과 양쪽이 서로 다른 하얗고 검은 눈동자를 특이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극단적으로 색이 없는 분위기와 겹쳐져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 특별한 척을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
달칵, 달칵.
애덤의 형은 누구나 성공했다고 표현할 법한 어른이었다. 그는 29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름 있는 대학의 조교수가 되어 연구 실적을 착실히 쌓고 있는 학자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친화력, 거기에 부드러운 백금발까지 더해져 호감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적었다. 내성적인 면이 있어 과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걸 즐기진 않았으나,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눈에 띄어버리는 특별한 사람이다.
달칵, 달칵.
바람 한 점 안 부는 날에, 창 밖의 환한 햇살과 대비되도록 어두운 방 안. 키보드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크다. 숨도 쉬지 않고 눈깜박임 없이 애덤의 형은 손가락을 움직인다. 정말로 에메랄드를 그대로 넣은 것 같은 무기질적인 눈에 무작위적 수열이 비치고 있다. 0과 1로 이루어진 아무 의미 없는 수열. 그리고 의미 없는 숫자를 생각 없이 적어넣는 손가락. 애덤의 형은 미동도 없었다. 애덤은 의자에 앉은 찌꺼기 파일을 내려다본다.
달칵, 달칵.
"언제쯤 재밌어질 거야?"
달칵, 달칵.
움직이지 않는 사람과 움직일 생각 없는 사람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 그랬더니 뭐라는줄 알아?! 지멋대로 하는 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래!"
애덤 크래프트는 술안주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속이 빈 원기둥을 찌그러뜨려놓은 것 같은 모양의 주전부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빤히 들여다본다. 그의 동료들은 이것을 흔히들 강냉이라고 부르지만, 애덤이 알기로는 강냉이는 팝콘과 비슷하게 생긴 음식이다. 주문 전에 나오는 기본 안주를 분류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적 생명체들이 이 음식을 강냉이로 대표해서 부르는 걸까. 그러고보니 진짜 강냉이랑 팝콘이 다른 점은 뭘까? 단순히 표준-지구 차원 기준으로 동서양의 차이라고 보기에는 그 맛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옥수수 알갱이를 부풀린다는 제조법은 동일하건만 식감이 이렇게나 다른 이유는 뭘까?
"아니, 차원을 돌봐주면 지네끼리 살겠다고 신은 필요없다 그러고, 그렇다고 안 봐주는 놈들은 자기네 보살펴달라 그러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세피라가 지네 봉인줄 아는 거야 뭐야?! 내가 걔네들 하고싶다는 거 다 맞춰줘야 해?!"
"애덤 뭐 하냐."
"응? 응. 보석상이 30만원 손해라고 생각해."
"이 놈 안 듣고 있었잖아......"
술자리를 만든 세피라는 술에 취해 엉엉 울고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던 다른 세피라는 아랫턱을 맞부딪치며 못마땅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애덤에겐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을. 초록색 술안주를 눈 앞에서 두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한다.
"아예 자유 의지를 없애버리면 되잖아?"
"클라이언트가 그걸 안 원하니까 문제지... 아니 물론 자유의지 없는 차원이 재미없는 건 인정하는데. 그러면 지네들이 만들든가! 그러면 아무도 고통 안 받고 얼마나 좋아!"
"대신 우리 회사 일거리가 줄어들겠지."
"와, 좋네. 회사 망해버려라."
"회장님 방금 그 말 애덤이 한 말입니다 잡아가세요!!"
"괜찮아 내가 이겨."
시덥잖은 대화 치고는 무서운 이야기들이 오갔으나 결국은 술주정뱅이들의 한탄이자 허세였다. 그리고 그 중 한 술주정뱅이가 눈물 범벅인 얼굴을 한 채 애덤의 어깨를 두드린다.
"우리 덤덤이는 언제쯤 자기 차원 만들어보냐아아..."
주제 흐리기는 술꾼의 특기였다.
"많이 만들었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남들 계획대로만 만드는 게, 그-게-! 어딜 봐서 네 차원이냐고오. 이 반쪽짜리 세피라야."
"칭찬해줘서 고마워."
"그러고보니 너, 이제 슬슬 부서 옮길 때도 되지 않았어? 몇백 년 동안 한 곳에만 있으면 안 심심하냐."
어깨에 기댄 술꾼에게 손때 묻은 술안주를 먹이며 대답한다.
"지금 부서 사람들이 좋아서 아직은 딱히."
별 관심은 없었는지 시큰둥하게 대꾸한 그 세피라는 SF과의 유명한 진상 손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애덤은 그 이야기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분홍색 술안주를 손바닥 위에 얹어놓는다. 눈을 한번 깜박이곤, 아, 애덤의 사무실에서 맞은 편에 앉은 이름 모를 선배가 그 클라이언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대화에 참여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세상 사는 이야기보단 강냉이와 팝콘의 상관관계가 더 흥미롭다고 결론을 내렸다.
배경은 중세풍 시대, 마법과 검이 존재하는 판타지 차원. 왕국의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만끽하며 어진 임금을 찬양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검은 반점이 몸에 새겨진 일족들, 검은 일족은 사람들에게 불길함의 상징이라 여겨지며 천대받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우로디 또한 검은 일족으로 태어났으나 왕하 성기사단에 들어가 왕국을 위해 검을 들고자 한다. 여러 시련을 겪으며 성장과 좌절을 반복하는 주인공. 무너지는 순간마다 아우로디는 신에게 고통의 이유를 물으나 신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검은 일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성기사단의 높은 자리까지 오른 아우로디. 그러나 여전히 검은 일족에 대한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검은 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헛소문과 음해에 시달리다가 관직에서 반강제로 내려오게 되고, 왕성에서 올바른 일을 했다는 이유로 평생의 천적에게 깊은 밤 암살을 당하게 된다. 죽기 직전 아우로디는 외쳤다, "신이시여, 이 모든 고통이 무슨 의미가 되었나이까?" 그러나 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때? 애초에 처음부터 신따윈 없는 세계였는데도 끝까지 그걸 모르고 결국엔 현실에 져버린 인간! 웃기지? 와-안전 해학적이지? 이거, 잘 팔릴까?"
직장 동료가 보여준 차원을 차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애덤이 말했다.
"두 번째 말하는 거지만 나는 해피엔딩만 좋아하기 때문에 편향되지 않은 평가를 해주기가 힘들어."
이 말은 '이 재미도 없는 작품에 대한 대화는 딱히 하고싶지 않다'라는 뜻을 돌려 말한 것이다. 그래도 이 눈치없는 동료 세피라는 재미있었는지만 말해달라며 끝까지 매달려서 조르고 있다. 아무리 세피라들이 개인주의적이라지만 이렇게나 눈치가 없을 수 있나? 자기 어깨를 잡고 흔드는 세피라의 앞발이 고양이를 닮지만 않았어도 애덤은 드물게도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화가 날 정도로 배드엔딩을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보여주러 오는 건 자제해주었으면 한다.
"아마 이 차원이 영화로서 극장에 개봉된다면..."
"응응."
"... 관객들에게 '그런 영화도 있었어?' 란 소리나 듣다가 4주만에 스크린에서 내려갈 거라고 생각해."
"왜?! 재미 없었어?!"
"응."
"그건 네가 강경해피엔딩파라 그런 거야."
"그럴거면 나한테 왜 네 실험작에 대한 의견을 물으러 왔는지 물어봐도 될까?"
"너 쿠션어 조지게 깔면서 의외로 할 말 못할 말 다 하니까! 됐고, 어디가 재미없었는지나 말해봐."
자신있게 만든 작품이 혹평을 듣자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앞발로 얼굴을 괴고 초코칩 과자를 한움큼 입속에 욱여넣는다. 애덤의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재미없는 작품에 집중하게 되었다. 양쪽 색이 다른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어디가 재미없다고 느꼈을까. 이야기가 담긴 차원 그 자체를 사고파는 입장이니 연출 기법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마나다. 그러면 서사 진행과 관련해서 조언을 해주어야겠지. ... 어느 부분이 재미가 없는 거였지? 자아 성찰도 지지부진해 자아정체성마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피라에게 이야기의 문제점을 집어내라는 요청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한참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이건 내 생각인데."
"응."
"내가 네 이야기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 건 주인공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결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독자 입장으로서 출신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올바른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을 그동안 주인공이 겪은 시련만큼 받을 것을 당연하게 예상하는데 그 예상을 빗겨나갔기 때문에 엔딩에 반감을 느끼는 것 같아."
"그건 그냥 네 취향이잖아."
"그런가?"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는 게 바로 반전이잖아! 반전을 통한 카타르시스! 쾌감! 넌 그냥 해피엔딩만 고집하니까 반전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창작물에서 원하는 재미는 부정적인 방향의 반전에서 오는 재미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 대해 또 한 가지를 깨달았네. 애덤 특유의 무표정은 그대로였으나 묘하게 들떠보이는 얼굴을 한 채 말했다. 그의 사고가 다른 길로 새어버렸다. 동료 세피라는 앞발로 애덤의 정수리를 콩 때려 이야기를 원 궤도로 되돌린다.
"그래서 나는 해피엔딩만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데. 세 번째 말하는 거지만."
"내 작품 싫어하는 사람한테서도 의견 들으면 좋지."
애덤이 또 한번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인다.
"노력에 맞는 결과가 뒤따르지 많아서 나는 큰 안타까움을 느낀 것 같아."
"연민은 비극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란다, 꼬꼬맹이 크래프트? 마냥 행복한 희극과는 달리 적절한 슬픔과 좌절이 비극을 더 현실적이고 재미있게 만들지!"
"현실이 마냥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작품 속에서라도 완벽히 공정한 세상을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뭐 어쩌겠어, 현실이 이 모양인데! 난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을 만든 거라니까?"
"나는 네가 내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들켰어? 하하. 그래도 이건 내 가치관과 관련된 부분이라서."
가치관 말이지. 조용히 중얼거리며 애덤은 동료 세피라의 차원을 눈을 내리깔고 바라본다.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아우로디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신이시여, 이 고통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되나이까?'
"내가 이래서 세피라를 안 좋아해."
"왜?"
"함부로 신을 자칭하고 다니니까."
"...... 갑자기?"
애덤은 그가 온전히 인간이었을 시절을 회상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2019년을 겪으며 애덤은 갈구했다, "신이시여, 제가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진정한 신은 불공정하지 않은 현실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평등하지 않은 세계를 만든 건 작가인 너인데 현실은 평등하지 않으니 받아들이라고 아우로디에게 강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얘 또 급발진하네."
"세피라는 가짜 신이야."
"논점 이탈했잖아, 바보야."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더 강하게 꿀밤이 들어왔다. 애덤은 입술을 다물었지만 생각까지 멈추지는 않았다. 옆에 앉은 이 세피라도, 지금까지 만나본 회사의 다른 세피라들도, 하나같이 애덤이 갈망하던 신의 모습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다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차원이 굴러가길 원하고, 차원 구성원 하나하나의 행복을 바라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진짜 신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정의롭게,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정의로만 움직이고 모든 면에서 완전한 논리로만 움직이는,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릴 권리를 평등하게 부여해줘야 하는. 그런 세상 원리야말로 비로소 신이라고 불러야 할 터였다.
"애덤, 애-덤."
"......"
"애덤 크래프트! 내 말 안 들려?!"
"...... 응? 응, 아니. 들려."
"얘 또 멍때리는 것 좀 봐. 더 말할 것도 없어보이고 싫어하는 것도 같은데 나 그럼 그냥 간다? 뭐 볼일 없지?"
"응, 너에게 더 하고싶은 말은 없어. 나중에 합당한 보상 기대할게."
그래서 애덤은 회사의 동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린아이의 투정과 비슷할 수도 있겠으나.
싫은 일 시켜서 미안하다며 손을 흔들고 떠나는 동료를 애덤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물이 잠을 자는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표준-지구 기반 차원의 표준-지구 기반 생물체 기준으로 하루 평균 8시간, 일일 1/3 동안 외부 자극에 즉각적 대응을 할 수 없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잠은 어떠한 측면에서든 생물체의 생존에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노폐물 배출, 피로 해소, 그 외. 그 중에서도 인간으로 대표되는 고지능군의 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있다. (표준-인간을 고지능군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한 퀴퀴한 종차별주의적 논쟁은 지금은 접어두도록 하자.) "기상 시간 동안 해당 개체가 획득한 정보와 경험, 기억을 re-sort하기 위함."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꿈"은 정보-재-정렬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꿈을 구성하는 정보는 해당 개체가 사전에 경험한 정보들 중 선정되며 트라우마 등으로 인한 꿈이 아닌 경우 당일 혹은 근 시일 내 겪은 인상깊은 사건을 꿈에서 재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 가설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꿈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가설도 있다: "미래를 대비한 시뮬레이션". 당신이 고양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오늘 좁고 높은 벽돌담 위를 걷다가 발을 헛디뎠다.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더 조심조심히 걸어야할 것이다. 당신의 뇌는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의 뇌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조심조심히 걷는 연습을 하는 게 좋겠어!" 꿈을 그 방안으로 선택한다. 사전정보를 바탕으로 구축된 시뮬레이션 차원.
애덤 크래프트는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위한 예비 차원을 주조하기를 즐긴다. 1.5kg 기관 내 저장된 10억 년 이상 되는 크기의 저장 파일들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일련의 행위를 꾸준한 하루 루틴으로 삼는다. 당연히 애덤 크래프트한테는 생물체가 환경 적응을 위해 진화론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 애덤 크래프트의 Class에는 상수값으로 세피라가 주어진지 오래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크래프트가 잠을 자고자 하는 이유는 진화론적 혹은 뇌과학적인 설명 외에도 몇 가지를 더 들 수 있다. 우선, 잠은 습관이다. 인간성 견지 염원하던 시절 억지로 무미의 덩어리를 소화 기관에 욱여넣던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인간인 것마냥 고통의 의미가 존재한다고 존재치도 않는 제 신한테 매달려 떼쓰는 것마냥 실재를 외면하고자 자기를 차단한다. 굿바이. 이상계에서 봅시다. 도피행이 유명무실한 지금도 습관이 남았다. 또한 잠은 꽤나 유용한 변명거리로 삼을 수 있다. 너 왜 연락 안 받았어? 자느라 못 들었어. 덕분에 애덤 크래프트 향한 세피라들의 평가는 날이 갈수록 고공낙하를 되풀이하지만 결격사유 하나씩 지닌 되다 만 존재들 주제에 날 비난하면 상대적 상승이라도 노릴 수 있을 것 같아? (근무 시간 외에는 업무 관련 연락을 하지 맙시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새하얀 도화지 위에 철제 침대 하나 덜렁 놓인 연유가 이와 같다. 차원 내 차원서 차원 생성하길 반복하는 것도 나름 재밌다는 의미다. 뜻깊은 경험, 재밌었던 기억, 행복한 추억 하나하나 꺼내 '재경험하고 싶은 목록' 대기열에 올려놓는다. 무의식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아. 그러고보니."
자려고 눈을 감았던 애덤 크래프트가 검고 하얗고 하얗고 검은 눈 퍼뜩 들어올린다. 정보-재-정렬 과정에서 허투루 지나갈 수 없는 사항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오류인가? 아니다. 이를테면 교과서에 밑줄 쳐놓고 형광펜 칠하고 별표도 쳐놓고 이거 완전 중요 선생님이 강조하셨음 돼지꼬리 땡땡까지 해놓은 문장 하나에 가깝다. 잊혀지지도 않는다지만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다. 순간의 열기에 휩싸여 평생을 결정지을 선택을 해버렸던 순간. (평생이겠지?) 꽃잎이 휘날렸던 건 기억의 긍정적 편향일까 있는 그대로의 기술일까?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기억편향 따위가 아니다.
내가, 너한테, "너는 내 신이야" 따위의 말을 했던가?
한껏 어리광을 부렸던 기억은 있다. 사랑은 열병에 가깝다곤 하나 당시의 저는 열 때문에 이성적 판단 기능이 마비라도 되었던 모양이지. (애덤은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구구절절 저가 하고싶은 말을 늘여뜨리긴 했다지만 연인 사이에 그 흔하다는 "사랑해" 한 마디조차 저는 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런 흔한 말보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을 더 좋아할 거야." 애덤은 변명했다. 그러나 그 변명도 어폐가 있다. 애덤 크래프트는 애덤 크래프트가 ●를 사랑하는 근본을 제시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음, 아주 매우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걸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너 없이는 내 세상이 무너져버릴 거야." 만약 애덤이 신으로 삼자 선택한 이가 그더러 영구적으로 소멸하라 하였다면 애덤 크래프트는 일체의 망설임과 의심 없이 이를 실행했을 것이다. 신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 로고스란 그러한 것이니까. 내가 선택하였고 나를 선택해준 당신이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좋은 존재였기에 망정이지. 오, 맙소사. 애덤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단전에서 소리가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장하다 나 자신. 아니, 애초에 원인은 ●인데! 잘못도 아닌 행동의 원인을 당신한테 귀인하며 책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덤은 그것을 비유적으로 명명하기로 결심했다. 이건 열병이다. 쏟아내지 아니하면 안 되건만 쏟아내지 아니하고 싶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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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당신이 나의 신으로 머무르길 거절한다면? 차근히 따져보자. 애덤 크래프트의 default는 '●의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수행한다'이다. 나의 신에서 내려오길 바란다 당신이 제안할 때에도 해당 값은 그대로 유지가 될 터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은 나의 신이 아니다. 이는 곧 애덤 크래프트가 ●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의무 또한 사라짐을 뜻한다. 나의 연인,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당신, ● 외에 내가 신으로 삼을 수 있을 존재가 또 무엇이 있을까. 지극히 당연한 사고 흐름으로 인해 나는 또 다시 당신을 신 자리로 올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당신의 명령을 따를 의무가 생기고, 이전에 주어졌던 명령에 의거하여 당신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밖에 없겠지. 무의미한 무한 루프에 나의 연산 회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열을 앓아 과부하가 찾아온다. 탈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느 한 부분을 끊어내야만 한다, 어디를?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나의 유일신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고난의 연속에서 지지대 없이 홀로 우뚝 서길 원하지 않는다. 이 고통을 오롯이 혼자서 겪길 원하지 않는데도... 장담컨대, 나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당신의 대명제가 충돌을 일으켜 당신도 나와 비슷한 무한루프를 겪을 것이다. 만약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 둘 중 하나가 사랑을 잃자고 결론을 내린다면 어떡하지. 생존을 위하여 필요 없는 기관을 퇴화시키는 것과 동일한 논리로써 존속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감정을 잘라내고자 한다면.
파국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기회를 달라 간청할 거야. 어쩌면 내가 찾지 못 한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두 눈을 감고 잠에 들어, 우리 둘 다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찾아 시뮬레이션을 반복할 테야. 오늘의 꿈은 그걸로 하자.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사건을 대비하여 지금부터 미리 해답을 탐색해보자.
그리 하여 애덤 크래프트는 잠에 빠져들었다. 이별의 대비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마냥 악몽은 아닐 것이다: 어찌 되었건, 꿈 속에서 ●을 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