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냑은 오늘도 예의 그 메아리와 같은 소음을 들었다. 참 이상한 점은, 사람들과 같이 일과를 보내는 동안은 그 메아리가 티끌만큼도 들리지 않다가, 자신이 일과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다음, 그러고 나서도 평안히 심신이 안정되었을 때야 비로소 들린다는 것이다. 왜? 아냑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구역으로 남아버린 자신의 화장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로 물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엔지니어 팀들이 단체로 미치고 날뛰거나 심란해지거나 함장님에게까지 연락이 닿는 일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수시로 점검하는 날이 잦아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괜찮았으니. 건조하기만 한 바닥은 아냑이 모선에서 생활하던 바닥과 동일했다.
지금 당장 다른 건 백색 소음과도 다른 웅성거리는 메아리, 귓가에 웅웅거리는,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것 하나뿐이다. 아냑은 자기 몸 걱정을 잘하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메아리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자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 그 감각들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였다는 듯 사라진다. 그 메아리는 원래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며 들었던 말소리가 맞다고 말해주는 듯이. 이런저런 걱정은 오늘도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힘없이 바람이 빠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둥근 눈이 다시 뜨인다.
아냑은 다시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봤다. 이 모든 소리가 잠잠해지고 네 감각이 맞다고 인정해 주며 쿨하게 넘어가는 고요 속에서 유일하게, 한번도 출처조차 모르겠는 소리가 하나 있다. 기묘한 흐느낌. 뭔가,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런 거.
아냑이 탄 모선에는 비록 개와 같은 동물은 없었지만 구시대 미디어엔 개의 여러 가지 모습과 소리가 녹아 있었고 그 소리도 그 중 하나였다. 아냑은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 지 사흘 정도 된 이 기이한 소음이, 다른 소음과는 달리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발목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과 요 근래 그의 근처에서 일어났던 당최 유래를 알 수 없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아냑이 플라스틱 고정형 테이블 위의 모니터를 보았다가 만다. 보고할 물건인지 아닌지는 이제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냑은 침대에서 일어나, 꼭 자러 갈 사람이 화장실 한 번 들러야지 하는 태도를 취하며,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끼익.
그가 과로로 기절한 건지, 혹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뇌가 셧다운을 해 기절한 건지 몰라도- 그 풍경이 있던 곳으로. 다시.
-
비현실적인 광경이였다.
하늘은 가짜 별들로 가득했다. 우주를 평생 바다처럼 삼는 우주인에게 있어 저 별의 배치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보다 쉬운 건 없었다. 마치 그림이 진짜인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진짜 같기도 했다. 끝없이 어두운 가운데 희미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
그 밑으로는, 그때,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드넓은 꽃밭이 보였다. 수많은 작은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선, 끝도 없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흰 빛깔을 띠는 꽃은 때로는 푸르스름하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분홍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때와는 달리 하늘에 수천수만의 나비 군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저 멀리에 무언가 보였다. 불그스름한 형체와...
“...사람?”
사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아냑은 자신이 이번엔 기절하지 않았음을 매우 감사히 여겼다. 그리고 기절했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위험신호를 여실히 느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을 열어두었다. 땅을 디뎌 본다. 꽃들이 그의 발에 맞춰 꽃대가 조금씩 꺾이거나 휘거나 부러진다. 지나치게 정적인 공간이다. 식물과 상호작용하는 소리 하나하나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냑은 생각했다. 내가 어쩌면 미쳐버린 나머지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곳에 있는 모선의 비상 해치를 열어서 기압도 난리 나고 모선 안도 난리 난 상태인 건 아닐까? 하고. 자신이 지금 밟고 있는 게 압력 차이로 찢어발겨진 동료들‘이였던’ 무언가면 어떡하지? 하고. 그러면서도 아냑은 나아갔다. 그게, 미지를 탐사하는 자의 우선순위다. 설령 거대한 불안을 품안에 안고 있더라도 나아가는 것.
식물 소리에 익숙해지자 발걸음은 조금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사박, 하는 소리가 처음 크게 귓가에 들렸을 때 아냑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저 먼 곳에 있는 인간 형상의 무언가가 미동조차 하지 않자, 아냑은 조금 더 사박, 하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걷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것은 없었다. 아냑의 뒤쪽에는 여전히 도망칠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었다. 달콤한 꿈처럼, 모든 게 마련되어 있었다. 아냑은 위장통이 생기는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꽃향기와 풀의 풋내가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처음 느끼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데도 자극적인 향들이 아냑의 어깨에 붙어 춤추듯 따라왔다.
아냑은 이동하는 동안에 신기한 것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를테면 돌로 이루어진 비석들.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물건들.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우주 인류 보편어의 이전 버전인 언어로 쓰여 있는 온갖 비석들. 그러나 이끼조차 끼지 않은 채 꽃무더기 위에 위풍당당하게, 이 자리는 자신들의 자리라고 서 있는 비석들.
아냑은 한동안 그 비석들이 무언가 표지석인 건 아닌지 내용을 들여다봤다.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정말로 묘비인 걸 알았을 때 아냑은 빠르게 이름만을 수첩에 적고 그 자리를 떠났다. 모든 비석을 지나쳤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으로 그는 의례를 대신했다.
그렇게 비석의 들판을 지나고 나면 그 인영은 정말로 가까워져 있다.
근처에 장미꽃을 닮은 양이... 아니, 장미꽃인지 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형체가 아냑을 흘끗 봤다가 도로 지나친다. 양은 어딘가에 기댄 채 늘어져 있는 수상한 인영에게도, 이 공간에 침입한 아냑에게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양은, 아니 장미꽃은 그냥 몇 걸음 떨어진 채 양이 울음소리 내는 형태를 흉내낼 뿐이였다.
아냑은 그것이 정말 징그럽다고 느끼면서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냑이 보기에 그 사람은 조금 마른 사람 같았다.
어딘가에 기댄 채 앉아서는 그대로 추욱 늘어진 자세라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었지만, 아냑은 적어도 자신보다 5cm는 클 것이리라 느꼈다. 그렇지 않았으면 멀리서 제대로 보였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냑은 이어서 검은 체모와, 꽤 창백한 피부색을 마저 확인한다. 눈 색은 어떻게 확인이 불가능하였고, 마치 잠든 듯이 존재했으니까, 그렇다고 깨웠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냑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다. 드문 일이다.
아냑은 그 대신 손을 살폈다. 드러나 있는 손은 길쭉하고 늘씬했다.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대다수의 사람들 손과는 꽤 달랐다. 저런 손은 인류가 우주에 나온 지 초창기 쯤에 잘 보였고, 지금은 다수 인류가 과학자나 엔지니어라는 직군을 선택한 시점에서 잘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저런 손을 뭐라고 하더라. 예술가의 손?
아냑은 살그머니, 소리 없이 움직여 이 사람(맞겠지?)이 기댄 것을 관찰했다. 이 들판에 있는 설치물은 비석밖에 보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아냑의 기대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람(추정)이 기대고 있던 것 역시 비석이였으니.
아냑은 그나마 특이점을 발견한다. 관리가 잘 되어있던 저쪽 비석 무리와 달리, 혼자 동떨어져 있는 이 비석은 많이 깨지고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시간의 손길을 온전히 받은 것 같았다. 아냑이 자세를 낮춰 글씨는 남아있지 않나 하고 살금살금 비석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
“...어?”
“...”
“...으아아악!”
새파란 눈과 동그랗고 검고 어둡고- 지극히 인간의 특징 중 하나인 눈의 형태가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어떻게 하지?
아냑은 다시 도망갈까? 생각했다. 그게 맞았다. 당초 계획이 무엇이였는가. 그냥 살아있는지, 아닌지. 사람인지, 아닌지... 이 공간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자신의 방과 이어지는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 온 거였잖은가. 절대로 이런 미지의 지성체와 접촉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아냑은 블루 스크린이 뜰 것 같은 머릿속을 최대한 다시 진정시켰다. 저것의 눈이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도망가면 그건... 음. 좋지 못한 판단이다. 아냑의 보라색 눈이 푸른 빛깔의 저 인간형 개체의 눈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리를 냈던가? 비명을 놀라서 지르긴 했다. 얼빠진 어, 하는 소리도 냈다. 아냑이 자기 입을 막았다. 어떡하지?
“...저기.”
“으악!”
“겁을 너무 드신 것 같은데.”
그때 그 인간형 개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냑에게 있어서는 조금 예스러운 발음으로 들렸다.
“겁 먹지 마세요.”
“두, 두려워 말라...?”
검은 체모에 푸른 눈을 가지고 창백한 피부빛깔을 한 인간형 개체가 짐짓 아냑은 조금 바보를 보는 눈으로 보았다. 아냑은 헛기침을 했다.
“...아니군요?”
-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세계의 관리자는 저 말이 어디서 나온지도 알았고, 자신이 그 말이 나올법한 상대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도 그럴것이 일단, 세계의 관리자니까.
관리자는 그냥,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늘어져 잠든 사이에 또 거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조절이 영 안 되는 걸 보면 자신의 불안정함이 느껴진다. 이래선 안 되는데. 게다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심지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나타나버린 특이점이다.
영영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이 어쩌면 이 사람에 의해 깨어났을지도 모르는 그런.
푸른 눈이 자신의 세상에 탄생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을 본다. 자신이 빚지도 않은, 그러나 스스로 잘 살아나가고 있고, 이야기를 써가고 있는 존재를.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을, 인류를.
정말 멋진 사람들이야.
“저기...”
그 사람이 관리자에게 묻는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세계의 관리자는 질문을 기다렸다.
“...그, 누구신지.”
음.
어떻게 하지.
다음 중 옳은 대답을 고르시오. 1번. 구인류라고 하기.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환영 받을 대답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반은 거짓말이다. 하지 말자. 2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기. 괜찮아 보이는데 내 양심이 아프다. 보류하자. 3번. 세상의 신이라고 하기. 그렇게 됐다가 이 사람한테 무슨 눈초리를 받을지 너무 예상이 가는데...
관리자는 앉아있던 채로 흘러내리다시피 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봐야 상대방은 서 있었고 자신은 앉은 채 올려다보는 상태였지만. 상대방은 그걸 일종의 대답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비석에 무언가 단서가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금방 자신이 가리고 있던 면을 흘긋거리더라. 관리자는 그냥 비석을 읽을 때까지 두기로 했다.
“...이건 당신의 이름인가요?”
깨진 글자가 비석 위에 있었다. 돌이 삭고 깨져 알아볼 수 없게 된 이름이다. 관리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밑에 있는 건 생몰년도인가요?”
닳아 없어진 숫자는 그의 탄생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밑에 있는 사람들 이름은 뭔가요?”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스르륵, 눈꺼풀 밑으로 가려졌다. 저 사람도 짐작하는 바나 수상하게 여기는 바가 점점 많아졌겠지. 그러니까...
“희생자입니다.”
“희생자라니요.”
“저는 당신 세상의 관리자고.”
...서투른 고해를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다.
-
관리자?
아냑은 그 호칭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통신망에서 말이다.
비록 실제로 마주하는 관리자들은 그렇게 위엄이 있지도 않고,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유치찬란한 데다가, 구인류들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통신망 속 문화 언어를 활발히 사용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아냑이 이해한 관리자는 그랬다. 한 차원을 관장한다.
한 차원.
아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당신이?”
“네.”
“당신이 우리 차원의 신... 이라고요?”
“...그보다 더 높죠.”
음울해 보이는 얼굴을 아냑은 보았으나 아냑은 순식간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냑은 물어봐야 할 것이 자신에게 이렇게 많았는지 스스로에게 감탄하기까지 했다. 질문이 그의 입에서 폭풍처럼 튀어나왔다.
“진실이에요?”
“네.”
“희생자라는 건 뭐고?”
“그것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정말 신이 맞다면 왜 여기에 있죠?”
“...원래는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당신이 도달한 겁니다.”
“지평좌표계가 우연히 나에게 꽂히기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이상한 연결망도 당신 소행이에요?”
“소행이라고 하지 마시고. 그리고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이 신이라면, 그럼.”
아냑은 후둑 떨어지는 질문 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어떤 것 하나를 찾아냈다.
“그동안 무얼 했나요...?”
“...”
왜 눈 앞의 존재가 인간 앞에서 낮은 자세를 하고 음울함을 보였는지 그제서야 그는 이해했다. 이해보다 더 뜨거운 것이 잠시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마 그건 분노였을 거다.
“관리자... 라면서.”
-
“...죄송합니다.”
변명할 수 없는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 부실로 인해 차원이 이렇게 된 건 다 자신의 탓이었다.
관리자는, 특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아주 능숙한 관리자는 눈 앞의 특이점이 불쾌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 알았다. 분노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올 지도 모르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차라리 주먹에 얻어맞아도 괜찮지 않을까. 관리자가 음울한 낯에 깨질 듯한 미소를 덧그렸다.
“제가 세상을 방치한 탓에.”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아냑은 점점 부글부글 끓는 속이 자신을 잡아먹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우주로 내쫓긴 사람의 한스러움, 지구에 대한 이유 없는 동경, 동질감, 멀어진 느낌, 향수병, 주변에 깔려있던 잔잔한 우울함,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발끝자락에서 머리 끝까지 기어올라 기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끓는 기름이 그의 머리에 부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넘어가려고?”
“넘어가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하려고요. 나더러 뭘 하라고?”
“제가 그렇다고 바랄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냑은 자신도 왜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에 나서고 몇십, 몇백년이 흘렀다. 그동안 인류는 뿔뿔이 흩어졌고 신을 찾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신이 정말 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될 동안 살려주셨겠지. 아니지, 신이 계셨으니 그런 천벌을 맞은 거야. 그러고도 우리는 살아남은 거라고. 동료들이 떠들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 아냑은 깨달았다.
아냑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아니지, 당신은 내게 이걸 바라야 해.”
“당신한테 있던 일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해체해서 물어뜯으라고 해야 한다고!”
사건의 경위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관리자의 마른 어깨를 콱 잡았다.
-
아냑을 장미인지 양인지 모르겠는 생물이 한바탕 들이받았다. 진정하라는 뜻이다. 아냑은 그러고 나서도 성에 안 차는지 씨근거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지적 생명체이자 지성 있는 만물의 영장이자 인류 최후의 보루 중 수많은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는지 사뭇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후우, 뜨거운 한숨이 아냑의 입에서 나왔다. 관리자는 여전히 묘비 곁에서 힘없이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뿐이다.
아냑은 제 몸에 붙은 장미꽃잎의 향이나 맡으면서 관리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흘긋, 가끔 자신이 나온 문 방향을 보기도 하고. 닫혔나, 그렇지 않았나.
“거긴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여기 있는데 왜 닫겠어요.”
“...아니 보통 닫고서는 증거 인멸을 하지 않아?”
“...그럼 도망치셨어야지, 왜 기다리고 계세요?”
“죽어도 들어야겠다 싶어서.”
살벌함이 조금 펴발라져 있지만 본질은 우주에 둥둥 뜬 인류로서 가지는 거대한 부유감일 것이다. 거기서부터 오는 공허함. 관리자는 뿌리 없이 다니는 삶을 이해했다. 그리고 관리자는 자신의 말이 어느정도 까지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으나, 일단 원없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방치했는지를 물으신다면, 정말... 간단해요. 이곳에서 흐르던 이야기가 모두 종결되었거든요. 새 이야기거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질 못했죠. 그걸 만들지도 않았고.”
삭막한 말이다.
“그냥, 끝까지 붙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묻어나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문장이다.
“그걸로 끝?”
“네.”
“...원망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그렇게 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아서요.”
“으음.”
아냑은 고민한다. 솔직히 원망을 하고는 싶었다. 자신도 이유 없는 어떤 억울함이 울렁거리고 있단 말이다. 그게 자꾸 열을 내게 만들어서 못된 말 하나하나를 성심성의껏 빚어 올릴 것 같았단 말이다. 그건 썩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위축된 존재한테, 괴롭히라고 넙죽 매를 받는 느낌은 굉장히... 불쾌하고 폭력적이었다. 설령 존재 자신이 아냑에게 스스로 매를 넘겨주었더래도. 아냑은 눈매를 찌푸렸다.
“그거 싫은데요. 애초에 난 신도 안 믿고.”
“그런가요.”
“우리 함선 이름이 아약스 호에요. 신 같은 거 안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믿는 동료들도 더러 있지만. 신 버리고 활동하기.”
“...그렇군요.”
“외행성대라서요. 신에게 비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럴 시간에 인간들끼리 뭉쳐서 뭐 하나라도 해내는 게 낫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럴 만한 곳이고... 뭔 작은 운석 하나 막아줄 목성 궤도보다 더 먼 곳이니까.”
아냑이 조금 나쁜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지는 못했단 뜻이다.
“그러니까, 음.”
“날 부정하고 싶다.”
“그렇지.”
“...”
“...좀 그런가? 눈 앞에 두고 난 당신 없는 취급 할 거다 하는 거.”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치만 좀 들어 봐요.”
아냑이 박수를 착착 쳤다.
“당신이 없는 시간대가 언제였어요.”
“...300년?”
“그래요. 인류는 그동안 알아서 우주에 갔어요.”
“하지만 지구가 그렇게 됐잖아요.”
“그... 건 솔직히 현시점에선 인류의 업보라고 다들 결론을 내려서 댁이 아무리 내 잘못이오 해도 이론적으로는 잘 안 와닿고.”
아냑도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많이 애쓰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턱을 몇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관리자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울컥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러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묻는 거 아니야. 관리자로서 한 일이 뭔지. 깨어있을 땐 무슨 일을 한 건지. 잠든 건... 뭐.”
“제가 잠든 건 호통치지 않으시는 건가요?”
“호통을 쳤다고 내가.”
“...”
“이 정도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신한테서 졸업을 못하고 신한테 기적만 바라는 게 정상이였다면 인류는 그때 망했어야 하는 게 좀 맞을 것 같은데...”
관리자가 처음으로 일어났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이다. 항의의 행동이 아냑의 시야에도 훅 들어오자 당연히 아냑도 놀랐다. 움직일 줄 몰랐단 말이다. 아냑은 역시 고분고분이고 나발이고 일단 생긴 게 인간이고 두 발도 달렸는데 이걸 예상을 못 하고 놀라다니 참 우습다, 하고 속으로 자조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놀란 건 놀란 거다.
“와 깜짝이야.”
“...다시 앉을까요?”
“아뇨, 키를 대략적으로 알게 돼서 좋네요 그래. 176?”
“cm 단위를 쓰시는구나...”
“야드 파운드 법은 죽었어.”
약간의 농담이 한차례 대화를 환기한다. 음울한 고해자와 냉정한 과학수사원의 조금 딱딱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그래서, 한 일이 뭔가요.”
그리고 다시 굳어졌다.
아냑 때문만은 아니다. 고해자를 자칭하고 있던 관리자가 말 없이 희생자의 이름들이라고 한 묘비 아래쪽을 가리키고, 뒤이어 아냑이 한차례 지나쳐 온 묘비들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을 모두 달래주고 평안과 안식을 주고 있었어요.”
“에.”
“...현세에도 물론 뭔가를 하긴 했습니다. 현실에 위험이 갈 만한 물건들이나 힘은 모두 회수했고.”
“그런 게 있었어요? 초능력?”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건 아쉽네. 아냑이 농담 삼아 말을 했다.
“그게 있었으면 어쩌면 다른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
“어쩌면 당신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을지도.”
“왜 치웠나요?”
“현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니까...? 그리고 개중엔 사람도 좀 잡아먹는 괴물이 있고.”
“오, 없애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관리자는 이쯤에서 이 사람이 자길 취조하는 건지 변호하는 건지 혼내려는 건지 화를 내러 온 건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자가 다 그런가? ...그가 아는 한, 과학자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긴 했다.
“그리고 또, 세상이 좀 더 좋아졌으면 해서.”
“해서?”
“사람들이 좀 더... 선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좋겠어서?”
“...따져 묻지 말아 주실래요.”
“하지만 아까 냅다 대답 회피한 것 치고는 한 일이 좀 있으시길래. 게다가 이번에는 인류에 직접적으로 손을 댄 거잖아요.”
“그렇게 직접 손을 댄 건 아니에요. 그냥 내면을 전반적으로, 악성에 물들지 않게, 악에 저항할 수 있게.”
“어느 강도로?”
“...갑자기 변하면 안 되니까 미세 조정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렇군요.”
관리자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직위를 물려받은 관리자라면 말이다. 그가 자리를 물려받은 직후 제일 급한 건 전대가 어질러놓은 온갖 기묘한 물건들과 힘의 처리였고, 자기에게 트라우마를 극심하게 안겨준 재단이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전대 관리자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자신에게는 정말, 그토록 사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다른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니었으니까.
친구 한 명의 얼굴이 스쳤다가 사라진다. 그 애도 이 세상에서 평온하게 죽어갔다. 그랬다. 자기가 손을 더 댔다가 어떻게 멸망할 줄 알고 감히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하겠는가.
아냑은 다르게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관리자의 뒷사정을 알 리도 없었다.
“...그럼 인류는 원래 멸망할 처지였는데 탈출 성공한 걸지도.”
“네?”
“아니 그냥, 관리자씨 말 들어보면 좀 그렇잖나 싶어서요. 그러니까 개 조- 아니.”
아냑이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고친다.
“환경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시에 살아보지 않은 한 모르겠죠. 기록이라고 한들 그게 파편적일 수도 있고, 잘못된 기록일 수도 있고, 편파적으로 적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어요. 그건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이 됐어요. 살려고 아등바등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온다. 살기 위해 착해지는 사람들이라. 아냑은 희망이 없던 조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었다. 평소에는 생각도 안하던 문제였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을 했고.”
“...예?”
“인류는 그냥 쌓은 업보를 개같이 쳐맞았다는 겁니다.”
“네??”
“보험금 지급 끝!”
“아니, 잠깐. 네?”
“말했죠. 그쯤 발전했는데 신을 찾으면 그건 그냥 인류가 개같이 망한 거라고.”
그리고 아냑은 빠르게 조상에 대한 결정을 했다. 평소에도 냉소적으로 조상을 판단하던 그는 진지하게 판단해야 할 순간에 이르러서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냥 그런 겁니다.”
아냑은 눈 앞의 상대가 단지 낮아보이고 탓을 하라고 생살을 들어내 보여주고 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쾌했다.
그리하여 아냑은 본래부터 인류가 그토록 맹비난해온 조상들의 업보를 열심히 들먹이기로 했다.
이 다음부터 한 시간 가량은 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일어났던 인류의 자질구레한 역사 강의가 이어졌고, 아냑은 여기서 관리자에게 터뜨렸어야 하는 화를 한시간동안 조상에게 마음껏 대신 분출했다. 관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자기가 왜 아직 아무것도 얻어맞지 않고 그대로 멀쩡히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만 어렴풋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해할 뿐이었다. 자신과 아주 엮이기 싫구나. 지금 어렵게 이루어낸 인류의 새 역사마저 내 것이 되면 안 되니까.
열성적인 강의를 마친 아냑이 벌겋게 물든 얼굴을 슥슥 닦았다.
“그럼 이제 무얼 할 계획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뭔가 좀 계획적으로 살아볼 생각은 없어요?”
“나름, 운동도 하고 있고. 햇볕도 보고 있-”
“햇볕??”
-
아냑은 그제서야 한참을 또 관리자에게 화를 낼 수 있었다. 섭섭함과 서운함으로 포장된 뜨뜻한 감정이 조금 정제된 언어로 관리자에게 날아갔다. 어떻게 혼자 햇볕을 즐기냐. 그럴 수 있냐. 그건 너무했다. 그런 유치한 말들로. 그리고 아냑은 다음에 보여줄까요, 하는 관리자의 제안에 매우 기겁했고.
‘그게 돼요??’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아냑은 그러는 대신에 여러 가지를 마저 요구했다. 첫째. 그 나비의 출처. 관리자는 자신의 것이 맞다고 하였고 아냑은 그 대가로 30분을 더 화를 냈다. 관리자는 그냥 흔흔하게 웃었다. 둘째. 정말 앞으로 계획은 없는 건지. 관리자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차원을 지키는 일을 좀 해볼 거라고 어리숙하게 답했다. 아냑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이렇게 계속 제 방 화장실에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을 연결해 놓고요?’
‘이건 실수예요. 진짜라고요.’
음.
더 관찰하고 싶은데 어쩌지. 아냑은 감정을 툭툭 털어낸 뒤에 남은 어딘가 허한 감정과 약간의 미안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안절부절못한 피조물로서의 위치에서 생기는 그런 것도.
그러다가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 나비 연구도 좀 미루고 할 겸 연구원이나 해주시면 안될까요.’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해 주세요.’
‘당신 차원의 피조물 언저리가 부탁하는 건데 좀 들어주세요.’
아냑은 그러고서 그 빌어먹을 나비가 얼마나 연구 자원을 갉아먹고 있고 식량 자원 개발 연구를 미루고 있는지를 한숨을 푹푹 쉬며 설명을 했다. 관리자는 이쯤 되어서 간접적으로 자신한테 화를 마구 내고 있군, 하는 생각을 했다. 다 들어주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연구자로 와 주세요.’
관리자의 마지막 대답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
아냑은 그리하야 지금 이 앞에 서 있다. 함장실. 손에는 들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후추랑 초콜릿. 게다가 초콜릿은 견과류까지 든 고급품이다.
“함장님, 실례지만... 신분증 하나를 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신분증 하나를- 잃어버려서.”
아무튼 얻어두면 어딘가에 쓸 데가 있다니까. 이렇게 쓸 생각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아냑의 보라색 눈은 그런 생각과는 달리, 당당하고 다채롭게 빛이 났다. 함장을 향해서.
그날 발급된 새 신분증의 얼굴은 오직 아냑만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곧 있으면, 며칠 내로, 여러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아냑은 이렇게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게 얼마만의 일인가 생각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그는 제 방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봤다. 보고서 입력란이 깜빡이고 있었다.
발신: 아냑
수신: 선임 연구원-
건의 사항, 수경 재배 작물 및 식량 연구 프로젝트를 다시 활성화할 것을 요청. ‘나비’에 대해, 생물로 봐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점이 너무 복잡함. 이에 집착하여 인류의 생존을 도외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됨. 우리는 생존해야 함.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자원을 넘겨줄 의무가 있음. 그렇기 때문에라도 프로젝트의 우선순위를 교체할 것을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