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막에서 떠나기 전날의 밤은, 축제가 끝나는 때의 밤은 아쉬움이 가득한 발들이 맴돈다. 그것은 발 뿐만 아니라 눈길, 손길로도 이어졌고, 곧 끝나지 않을 밤을 위해, 광란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잠을 포기한 채 사막을 내달린다.
사실, 사람들이 이 밤을 불태우는 것은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축제가 자유롭다 한들 일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떠나기 전날의 밤은 꼭 사람 형상으로 만든 거대한 목재 구조물을 불태우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모든 것을 불태운 이 곳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도 같은, 불의 일렁임은 사람을 홀리기도 하는 만큼.
이 밤을 맞이하며 그는, 그 모든 사람들에 포함되지 않는 동선을 탔다. 그의 텐트가 불길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유독 저렇게 무리 짓는 일에는 영 낄 자신이 없는 것도 한 몫 했다. 아웃사이더처럼 지내 버릇하더니 그것이 여기서 이렇게 작용할 줄이야. 마지막에 와서 부딪히지 못하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어쩌면 다른 곳에 부딪혀야 했음을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불길 가까이에 진작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행객이 텐트로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차라리 저 광란의 한복판에 가는 게 나았을까. 마주하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 밤 본 적도 없는 두통을 호소하던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작고도 큰 불안 요소가 되었다.
“작가님, 저기 안 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차피 여기서도 보이니까요 뭐. 작업도 작업이지만…”
“많은 영감이 저기서 이글거리는 것 같던데.”
어쩌면 그 광란 안에서, 미쳐 돌아가는 엔도르핀 속에서 새로운 키워드나 구상 같은 걸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구상하던 기존의 색채와는 또 다른 감상을 얻을 수는 있었겠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동행객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늦게라도 갔을 지도 모르겠다고, 맴도는 생각은 그저 변명이라는 것까지.
“그러는 옐링턴씨는 어쩐 일로 안 가시고?”
“아니, 뭐… 어쨌거나 내 동행객이잖아요, 그쪽은. 그렇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이쪽이 먼저 초대 비슷한 걸 했으니까, 좀 챙겨야지.”
이 말인 즉, 아이작은 그를 저 화염 기둥 근처에 데려다 놓을 목적으로 온 것이다, 하고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살짝 당황한 그가 본인도 모르게 좀 더 방어적인 태도로 나와서 쉽사리 제안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뭐 할 이야기도 있고.”
할 이야기, 그는 평온하던 제 눈썹을 조금 구겼다. 올 것이 온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자신이 바라는 건 어떤 방향인지, 그것도 아직 모르겠는데. 텐트에 조금 더 있겠다고 한 이상 도망칠 구석은 스스로 내팽개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득한 불꽃이 길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는 텐트에 들어서는 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프로젝트 건이면 안 합니다.”
“아니니까. 뭐 사실 여전히 섭외하고 싶긴 한데, 지금 용건은 좀 다르죠.”
“…할 이야기가 대체 어떤 주제이시길래.”
아이작의 눈이 잠깐 바닥 언저리를 훑었다.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내용이 맞는 건지, 최후의 고민이 눈가에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어디 바닥만 보았나, 자신의 손끝도 거슬리는 게 있는 마냥 살짝 보면서. 기다란 뜸들임이 이어지는 끝에, 입을 열었다.
“작가님…이 지금 쓰는 이름이 가명이시죠.”
“그걸 물어보시러 오셨나요, 굳이?”
“이왕 여기 온 김에 본명이라도 알려 주실 수 있나, 싶어서.”
그의 이름은 사회 안에서 영영 죽어버렸다. 사라진 기록 속에서 영원히 맴돌 이름이겠지. 언젠가의 톡방에서 만난 사람은 누군가를 애정하는 것이 지나쳐 세계에 틈을 만들었다고 한다. 차원을 관리하는 그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굉장히 신중하게 풀어나가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여태껏 존 도 씨, 하고 잘 부르셨으면서요?”
“…오, 강경하게 나오시네. 좋습니다.”
왜, 대체 뭘 하려고. 새파란 눈은 여지껏 속을 꿰뚫어 보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 같은 게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작가님, 작가님이 데뷔하시기 전에 혹시 본 적이 있나요?”
“그 쪽을요?”
“네, 저랑 작가님 말입니다.”
아니요, 라고 빠르게 대답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만난 적이 있었다. 마스크를 썼다고 하더라도, 유류품을 챙겨 가기 위해 옐링턴 가에 들러 아주 짧은 대면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혹시 몇 년 전 저희 집에 오셔서 주인 모를 상자를 챙겨 가신 건 누구일까요?”
아 젠장, 넌 왜 이런 기억을 잘 하고 있는 건데. 이번에는 그의 눈이 흔들리다가 못내 바닥으로 향했다. 하긴, 애초에 그는 관리자가 된 이후에도 제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들이를 다녀오지 않았나. 이건 어떻게 봐도 자신이 내어 놓은 결과였다. 이 상황도 전부.
“…그게 접니다.”
“봤네요, 그쵸. 콜로라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기 기억 상실을 겪었다는 건 아십니까?”
“…”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겠는 사람이 주인도 모르겠는 상자를 우리 집에서 가져간 게 수상하지는 않나요?”
“…수상하긴, 하네요…”
“그리고 작가님은 본명을 알려주지 않으셨고. 그 때 만난 사람이고.”
아이작은, 사실 어느 정도의 블러핑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블러핑이라기 보다는 떠 본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 때 떠올린 성씨가 아주 전에 일어난 어느 저택의 학살 사건과 연관 있는 성씨라거나.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그 때 본 푸른색 눈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거나. 아이작은 말없이 눈가를 툭툭 건드렸다. 그래, 여길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이 기억하는 한의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에 노점에서 파란 수국 이야기를 할 때 자리를 피하셨더라구요. 그 유류품이 거기서 나왔던 걸로 알거든. 그리고 우리 가족 전원이 파란 수국 모종이나 씨앗 같은 거 사온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
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하지? 아니, 그래도 부정은 해야 하지 않을까. 별처럼 빛나던 푸른 눈은 오늘따라 유독 모래의 폭풍에 파묻힐 것만 같이 흐렸다.
“너무 심증이 많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야기에 구미가 안 당겨서 그랬다고 했지 않나요?”
“우연이 한 번이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작가님은 그러면 대체 그 유류품이 누구의 유류품인지 아세요? 그리고 왜 있었는지?”
“아는 지인이 자기 짐을 이사하기 전에 두고 왔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 지인 분이 최소 30년은 전에 있으셨나 본데, 거기 있던 카메라는 그 나이 먹은 기종이 아니던데.”
“그 카메라는 원래 내 거였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아이작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통을 따라 얼굴이 조금 험악하게 변하기는 했지만, 이게 외려 압박을 줄 수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여기서 더 아프다면 또 다시 내쫓길 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표정을 주섬주섬 갈무리하면서.
“나랑 가까운 사람이 그 유류품의 주인이었어야 하는데, 나한테 그런 지인은 없거든요.”
“…단기 기억 상실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날아간 기억이 고등학생때로 편중되어 있으면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전 외부인일 뿐입니다만.”
외부인, 외부인. 정말로 이 사람은 외부인이 맞나? 그 상자 속에 있던 펠트 인형이며 카메라며 스케치며, 스케치. 그는 그대로 작가의 구상을 쏟아 놓은 노트를 찾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는 거냐며 당황스러운 물음이 들려왔으나, 두통은 판단력을 어느 정도 무디게 하기에 충분했기에.
“갑자기 스케치 노트는 왜, 옐링턴씨? 대화 도중에 이렇게 나오는 건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됩니다.”
누군가에겐 유감스럽고, 누군가에겐 다행인지 아닌 것인지 모를. 시간의 흐름과 인간에서의 탈피는 그의 구상에 여러 변동을 주었다. 습작과도 같은 학생 시절의 노트와, 비록 무명이지만 전시회를 꾸준히 열고 있는 지금의 노트는 확실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친구 또한 당황했는지 손을 공중에서 머뭇거리듯 놀리다가, 이내 양 눈을 누르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됐습니다. 나가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거든요.”
“아뇨, 아뇨…”
이젠 다행이 아니라 또한 유감이었다. 그 반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의 집 다락에서, 이 시츄에이션은 굉장히 자주 나오는 바였다. 왜 또 왔어? 우리 집인데 오면 안 되냐? 아저씨 아주머니 따라서 시내 한 바퀴 돌고 왔으면 그냥 얌전히 자라, 너 X나 피곤해 보이거든. 너는 진짜-
“…지금 인상 농담이 아니고 진짜 나빠 보여요.”
“괜찮습니다. 할 말은 마저 한 다음에.”
“아직도 남아 있나요?”
“…그 때, 유류품을 건넸을 때 떠오른 게 하나 있습니다.”
“에트와일러.”
그는 보기 좋게 동요하고 말았다. 진작에 텐트 바깥으로 쫓아냈어야 했다. 아니면,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내쫓아야 해? 외려 사실이라고 못 박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것을 지켜 보는 아이작 또한 심화되는 두통 속의 꿈 같은 기억들이 서서히 진실을 가리키기 시작했는지, 자세가 돌연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다행인 점은 그의 근처에 의자가 있었다는 점이고, 그의 운동 신경이 텐트 주인보다 훨씬 좋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정한 모습이 튀어나와도 전처럼 의료진에게 가 보라는 닦달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요가 삼엄하게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그 성이 뭐가 어떻다고.”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일어난, 사건. 사건이죠. 부유층 저택이 습격을 당해서, 고용인들과 저택 주인이 모두 숨져 버린. 그리고… 습격자들까지. 네…”
“지금 저한테 할 이야기랑 관계가-“
“당신이잖아.”
반신반의한 상태에서 내뱉은 말은 곧 극심한 충격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표현이 비유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를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짚을 것을 찾는 손이 갈퀴질을 하나, 그걸 잡아 줄 손은 피조차 돌지 않는 긴장 상태에 놓였다.
“…당신, 당신이지. 너지.”
“…계속 말해 봐요.”
노이즈, 수많은 노이즈 속에서 이미지는 구체화되고, 외따로 떨어진 교실 속의 누군가. 음성이라며 기억되는 목소리가 점점 뚜렷해지고. 파란 수국 하나가 공처럼 굴러다니고, 산발하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기억. 이 꽃의 꽃말은 무정이래. 그걸 왜 외우고 있나 했더니,
“…노점에서도 그렇고, …다락방에서도 그렇고… 너무 홀연히 사라지는 거 아니냐고.”
나는 너가 이름을 기억할 때까지 모르쇠할 것이다. 무정한 꽃잎이 별을 대신해 사막에 피어났다.
“다락방이라면 요전 전시회의 그 좁은 2층 말씀하시는지요.”
“진짜 너무하네. 그래서 너가 꽃말 이야기를 했구나, 그치.”
“데이브 에트와일러, 그치?”
애당초에 너가 먼저 내 교실로 찾아와서는 대뜸 내 이름을 물었지 않았냐고, 그리고 나는 너한테 이름을 물어 봤고, 그 대답이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
“이 새끼 안 늙었네.”
“…아 좋아, 아이작.”
“그래서, 뭐.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전에 없이 흉흉한 분위기가 깔릴 법도 했으나, 아이작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것도 제 친구가 그리 만들고 있다면 더욱. 가시 돋친 유령 같은 녀석인지라, 독립적인 걸 굉장히 좋아한다 여겼던 지라. 야밤의 추위가 들이닥치는 가운데 두통과 미열은 점점 머릿속의 세력을 높여 갔다. 한 쪽은 웃고, 한 쪽은 굳은 대화. 좋은 대화는 아니고, 재회한 친구한테 유하게 다가서고 싶긴 하지만,
왜 말 안 했어, 를 시작으로 하는 대화는 거칠게 흘러갈 준비를 끝마쳤다.
“굳이 말 할 필요를 못 느껴서.”
“속이니까 기분은 좋았고?”
“기억도 없는 사람을 속인 셈인 거야, 아니면 뭐야.”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찔러주기만 하면 돌아오는 걸 대체 왜-“
“-어차피 사회적으로 난 죽은 사람이야, 등신아. 돌아와서 뭘 하는데? 대체 뭘?”
윽박. 살점도 핏기도 없이 휘청거리기 직전처럼 보이는 한 관리자의 것이었다. 핏대가 서고, 색색거리기 시작한, 침착함을 필사적으로 가져오고 싶어하는 사람의 것이기도 했다. 또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것이며, 또는 누군가의 삶을 갈취해 버린 사람의 것이기도 하겠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아이작은 말을 아꼈다.
“보기도 싫은 가족도 없어. 내 신분도 사회적으로 죽었어. 난 죽은 사람이야. 알아? 아무 곳에도 발을 디딜 수 없다고.”
“…아니, 그, 래도,”
“그래도? 응, 그래, 그래도 너가 기억을 한다 어쩐다 해서 복구는 되겠지. 그게 실종이었으면 실종자가 돌아왔으니까 그게 복구는 됐겠지. 그치? 근데 이를 어떡하나, 내 부모 쪽 자식 관계 살펴본 적은 있을 거 아냐.”
“…없었지. 아무도 없었어. 이게 이상해서… 아.”
“난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니까. 있을 곳 그런 거 없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하하… 이야기해도 아무도 안 믿어 줄 일들 뿐이라서 어떻게 할까. 이야기해도 공감도 못 받을 일이라서 말이야.”
어차피 늘어 놓아도 그건 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순간에 벌어진 참사를 듣는다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쉽게도 예상이 갔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한순간에 차가워진다. 내가 여기서 무슨 소란을 피우고 감정을 내보낸다 한들 결국 나 스스로 피해의식을 가져서 그런 건 아니고? 무너질 것 같다, 분명 여기에 온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알려고 좀 하지 마, 제발… 꺼져. 나가.”
몰아쉬는 호흡이 거세다. 감정이 순식간에 터져 버려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말 뿐만 아니라 해서는 안 될 말 마저 해버린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기억된 걸로 끝내자. 제발 나가, 꺼져. 겨우 고인 눈물들을 다 닦아낼 무렵이었다. 헛기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일단, 그래, 알았어. 그러면!”
“그럼 추가적인 제안을 할까요, 존 도 씨. 우리 집에는 아직 다락방이 한참 비워져 있거든. 고양이 놀이방으로 쓰자니 애들이 계단 오르다가 다칠 것 같고…”
필사적으로 열감이 가득한 머리를 굴려 제안 하나를 꺼냈다. 적어도 너가 그런 상태라면,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새라도 둥지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어. 눈 앞의, 당장이라도 무너지게 생긴 까마귀는 이 말을 듣고 놀란 게 훤히 보였다. 끝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툭, 흘러내렸으니까.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하여튼 안쓰러운 건 옛날이랑 지금이랑 차이가 없다.
“…가끔 맥 앤 치즈 좀 주방에서 내려와서 먹어도 되니까.”
“됐습니다.”
“이건 좀 그런가.”
“…대신에, 공책, 하나만. 소설 좀 쓰다가 갈게요.”
제 호흡을 정리하며, 눈가도 다시 정돈하며 그가 역으로 부탁했다. 소설이라 함은, 그의 이야기일 것이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는 아이작은 제법 졸려 보이기도 하고, 아파 보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말 까지는 해야 겠다 싶었다.
“쓰면, 보러 와도 좋고.”
언젠가는 끊어질 인연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 이야기의 어느 정도가 진행된다면 멈출 생각이었다. 잉크병이 깨져 새카만 범벅이 된 이야기인 것을. 제 스스로 깨트린 것 투성이인. 하지만 그 전까지는,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게 낫겠지.
“…좋습니다, 존 도 씨. 그러면 뭐, 나가죠.”
“의료진한테 좀 가시죠. 식은땀이 머리카락에 다 엉겨 붙었어요.”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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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솔직히 난 좀 서럽다?”
“시끄러워 옐링턴. 너 때문에 난 지금 불놀이도 못 가고 있어.”
“서러운 걸 서럽다 하지도 못 하냐아.”
가는 길의 투닥거림은 제법 오랜만이지 아니한가. 비록 한 쪽은 골골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그걸 끌고 가기에 체급 차이가 제법 나서 둘 모두 고생길을 걷고 있었지만. 한 쪽은 큰 소득을 얻었나 싶었는지 웃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최대한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건지 정면만 보고 있었지만, 글쎄,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하지 아니한가.
“아 근데 난 너 울 줄은 몰랐네. 그건 미안.”
“아 쫌 진짜…”
정강이를 차려다 실패한 모습이 역력하게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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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떠날 때가 된 자들의 캠핑카 하나에는 마지막으로, 파란색 수국과 함께 D.E 라는 이니셜이 스프레이로 낙서되어 있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낙서라고, 차의 주인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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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족해? 그는 제 어딘가의 작고 어린 열 여섯과 일곱 사이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처음 만들어 질 때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온 금이었는데, 아이작과 대면을 자주 하면서 꿈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게 되지를 않나. 목적이 틀려먹게 된 것도 같지.
작은 그는 만족했다는 듯이, 병원복을 여미다가 제 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어느 날처럼, 그리고 그의 환각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다시 유유히 사라졌다. 사라진 그 자리에는 대신, 자리를 비웠던 그를 기다리는 원념들의 웅성거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괜찮다, 적어도 당분간은 자리가 하나 이상 저 밑에 생겼으니까. 계속 앓던 속의 앙금이 풀어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활력이 머금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