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눈을 떴다. 검보랏빛의 하늘 위에 그녀는 서 있었다. 얇은 석판이 겹겹이 깔린 듯한 땅을 딛고서. 티끌 한 점 없는 하늘을 여러 섬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공허. 제 고향 차원의 또 다른 이면세계. 그리고 세피라 그 자체. 안개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늘하고 소름끼치는 공기가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길을 걷던 안개의 앞에 돌연 부유하는 섬으로 이루어진 길이 나타났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안개는 익숙하게 그 길을 걸어갔다.
"호오, 이건 또 특별한 방문객이네!"
일순 공허를 울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떤 것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였고, 어떤 것은 노인의 것이었고, 어떤 것은 동물의 울음소리기도 했다. 공허 속에서 숨죽여 세상을 지켜보던 세피라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개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엔 그녀 말고 아무도 없었음에도.
"아아, 외부의 신과의 계약으로 세상을 바꿔버린 자, 인간을 벗어난 자, 안개 마녀라 불렸던 자, 서서히 다가오는 안개시여!"
뒤섞인 목소리들이 한바탕 요란하게 웃었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안개는 그제서야 자신이 한 차원의 세피라와 마주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전의 그녀가 그리도 증오스러워했던 검은 눈의 사내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자들.
"그래, 그래! 우리가 그를 신으로 만들었어. 지금은 산양 녀석에게 잡아먹히고 없지만, 헤헤!"
목소리들은 안개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한 소년이 광신도들의 손에 이끌려 제단 위에 올려졌다. 쌍날을 가진 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을 때 그는 신으로써 공허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 의식을 집도하도록 부추긴 것이 바로 공허, 세피라였고. 결과적으로 계약을 맺기 전의 안개가 그런 일을 겪은 것엔 그에게도 책임이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대는 또 다른 신을 만들 계획이겠죠."
안개는 쉽게 그의 의중을 꿰뚫어봤다. 공허가 새로운 신을 만들면 이 차원은 다시금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그가 그런 행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세피라는 필연적으로 차원의 멸망과 혼란을 초래할 수 밖에 없기에. 적어도 그녀가 다녀본 차원들은 전부 그러하였다. 세피라가 제 차원의 존재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정답이야, 정답!"
목소리들은 마치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물어보지도 않은 계획을 줄줄이 읊어놓는 것이었다. 안개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저 걸어갈 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너는 여기 뭐 하러 왔어? 알려줘, 알려줘!"
목소리들이 끈질기게 물어오며 안개를 방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펼쳐진 길은 계속해서 안개를 앞으로 인도해나갔다. 이내 그녀의 눈 안에 명멸하는 붉은 빛이 들어왔다. 저곳이 바로 공허, 세피라의 본 육체가 있는 곳. 안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내 그녀의 눈 앞에 거대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까만 눈자위에 검붉은 홍채를 지닌,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눈동자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꺼풀을 깜빡이기도 하고 눈동자를 굴리기도 했고. 안개는 눈동자에 가까이 다가가 그 매끄러운 표면에 손을 대었다. 아주 예전에 익히 느껴본 흑마법의 감각이, 마력의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안개는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검은 안개가 서서히 모여들며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잠깐, 뭐 하려는 거야?"
이상을 감지한 목소리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개는 개의치 않고, 손에 쥔 칼의 날을 세워 그대로 눈동자 속으로 쑤셔넣었다. 각막이 찢어지고 끈적이는 검은 액체가 피처럼 튀어올랐다. 목소리들이 새된 비명소리를 내었다. 안개는 칼날을 뒤틀어 더욱 깊게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온 공허를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들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것 같았다. 눈동자가 쉴새없이 검은 액체를 쏟아내었다. 매끈한 돌 바닥이 새까만 피에 흠뻑 적셔졌다. 홍채에 새겨진 붉은 빛이 희미해져갈 때 쯤에야 안개는 칼을 다시 거두었다.
"대체 왜! 우리가,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소리지르는 여러 목소리들이 요동치며 섞였다. 아이, 노파, 청년, 여인, 짐승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파고들었다.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세피라의 단말마였다. 공허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했던 안개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돌아오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안개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눈동자의 안광이 완전히 사라지자, 발악하던 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악감정은 없어요."
안개는 싱긋 웃었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단순했다. 대화방의 누군가가 세피라의 유해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래서였다. 그자는 안개가 나름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였기에. 그가 과연 어떻게 세피라를 죽일 것인지, 목적을 달성한 뒤엔 무엇을 할지 궁금했었다. 마침 다른 누군가도 그에게 유해를 보내준 듯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안개는 그나마 제일 만만한 고향 차원의 세피라를 찾아온 것이다. 안개는 칼을 들어 눈동자의 일부를 도려내었다. 그것이 곧 이 세피라의 유해이자 살점이었으니.
안개가 유해 채취를 끝마치자 주변 풍경이 액체마냥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공허가 무너지고 있었다. 세피라의 죽음은 곧 공허의 소멸. 이제 이 차원에서도 공허라는 세계의 존재는 전설 속에만 남게 될 것이다. 안개는 눈 앞의 공간을 찢어 균열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곤 균열의 틈을 비집고 그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선 잿빛 안개만이 피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